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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8-02-18 00:43
길에서 쓰는 편지 (1) - 수경
 글쓴이 : 순례단
조회 : 3,220  

길에서 쓰는 편지 (1)

화계사 신도님들과 함께 길을 걷습니다





벌써 집을 떠난 지 5일이 지났습니다. 중노릇을 하는 사람에게는 발길 닿는 곳이 집인데, 이렇게 집을 떠나왔다는 말이 나오는군요. 만리타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나그네의 심사가 어떤지를 알 것 같기도 합니다. 40년 넘게 먹물 옷을 입고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주지 소임을 맡아 신도님들과 함께 웃고 운 시간들이 제게는 참으로 소중하게 무거운 시간이었던가 봅니다. 이렇게 집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걸 보니까 말입니다.

하필이면 출발하던 날, 날씨는 왜 그리 춥던지요. 하지만 추운 날씨도 아랑곳 하지 않고 많이들 나와 주신 화계사 신도님들의 얼굴을 보는 순간 제 마음은 따뜻해졌습니다. 추위쯤이야 아무 것도 아닐 만큼 뜨거워졌습니다. 더욱이 '생명의 강'을 모시는 도보 순례 기간 동안 <생명 평화 기원 100일 참회기도>를 한다고 하니 저로서는 고맙고 또 고마울 따름입니다. 여러분들께서는 평생 수행자로 살아온 제가 부끄러울 만큼 진정한 기도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제가 왜 이 길을 나섰는지에 대해서 더 이상 신도님들께 얘기를 한다면, 그것은 불필요 할 뿐 아니라 이상한 일이 될 것입니다. 저의 도반이자 동지인 신도님들께서도 저와 똑 같은 심정일 테니까요. 그래서 앞으로는 그저 친한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듯이 강을 따라 걸으면서 느낀 바를 편지로 전할까 합니다.

5일째 걷고, 먹고, 자는 일이 반복됩니다. 지극히 단순한 하루하루가, 새삼스럽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묻게 합니다. 참 별것 아닙니다. 먹고 누고 자는 일이 전부입니다. 권력자도 부자도, 약자도 가난한 자도 이점에 있어서는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위해서 치러야 하는 대가는 실로 엄청납니다. 인간이란 동물은 불필요한 것들을 얻기 위해 삶을 탕진한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낍니다.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천하에 어리석고도 염치없는 동물로 사람과 짝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잘 먹고, 누고, 자는 것이야말로 인간답게 사는 일의 기본입니다. 현대인은 누구나 이런 기본에서 멀어져 있습니다.
 
첫째 날(2월 12일). 갑자기 추워진 날씨가 길을 떠나는 우리보다 더 비장했습니다.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쓸데없는 감상이 끼어들 자리가 없었으니까요.
화계사 신도님들을 비롯한 많은 분들이 격려를 해 주었습니다. 정토회의 법륜 스님, 문정현 신부님, 김지하 시인 등 여러분을 보면서, 순례단만이 이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오랜 만에 천막에서 잠을 잤습니다. 옷을 껴입고 침낭에 들어갔는데도 너무 추워서 자다 깨기를 반복했습니다. 앞으로는 나아지겠지요. 추위에 적응이 되고 곧 봄이 올 테니까요.

둘째 날(2월 13일). 꽁꽁 언 몸을 간신히 일으켜 세웠습니다. 떡국으로 아침을 먹고 김포시 하성면 석탄4리에서 출발해 한강하구 제방 옆 농로를 따라 용화사까지 13km를 걸었습니다. 얼음이 떠다니는 강물 위로 한가로이 노니는 철새들을 보면서, 이들이 다시 찾지 않는 한강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일입니다.

셋째 날(2월 14일). 김포 용화사를 출발하여 계양천을 거쳐 석골나루터 인근에서 일정을 마쳤습니다. 오늘은 한강을 만나는 일 자체가 힘들었습니다. 한강 하구 대부분이 군사 지역입니다. 우리는 철조망을 피해서 한강으로 흘러드는 김포지역의 하천을 따라 이동하습니다. 곳곳에서 산과 하천이 파헤쳐지고 있었습니다. 자연의 보살핌이 불가능한 형태로 자연을 망치는 데 혈세를 쏟아 붓고 있었습니다. 한국 사회의 암담한 '내일'이 적나라하게 펼쳐진 모습이었습니다.

 넷째 날(2월 15일), 체감 온도는 바람이 결정합니다. 햇살은 좋았지만 매서운 강바람이 얼굴을 얼얼하게 합니다.
서울 땅으로 들어섰습니다. 강서습지생태공원 자연적인 생태 환경은 왜 대운하가 재앙이 될 것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더군요.
여의도 국회의사당 뒤편에서 하루를 마칩니다. 이른 바 절차적 민주주의가 완성된 이후 답보 상태에 머물던 한국의 민주주의가 새로운 권위주의로 만나 후퇴할 조짐이 보입니다. 과연 국회는 국민의 대의기관인지, 권력자와 기득권자를 위한 거수기인지가 의심스럽습니다. 국민이 주인인 나라와는 거리가 멀어지는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다음 총선의 결과에 따라 이 나라의 문화적‧생태적 환경은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오늘 저녁은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신세를 졌습니다. 서울 지역의 한강변에서는 노숙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날(2월 16일). 여의도 국회의사당 뒤편 둔치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동호대교까지 걸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강남 봉은사에서 하룻밤 신세를 집니다.

영 몸이 시원치 않습니다. 그나마 큰 탈 없이 견뎌 주는 무릎이 고마울 뿐입니다. 걱정이 됩니다. 그만 둘 수도 없고, 순례단에 짐이 될 수도 없고…. 그저 끝까지 견뎌 주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걸음걸음마다 부처님의 이름과 보살님들의 이름과, 온갖 생명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우리의 한 걸음 한 걸음이 간절한 기도가 되어, 자비와 평화의 가피로 돌아오기만을 빌 따름입니다.

만생명을 위해 기도하시는 화계사 대중 여러분. 고맙습니다. 제가 걷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신도님들과 함께라는 사실을 한 순간도 잊지 않을 겁니다. 항상 건강 잘 살피시기를 빕니다. 사는 것 별 것 아닙니다. 덜 욕심내고, 꼭 필요한 것만으로 자족하는 것 이상의 행복한 삶은 없습니다.

2008년 2월 16일 저녁.

만생명의 평안을 기원하면서
수경 합장


화엄장 08-02-25 14:39
답변 삭제  
* 비밀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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